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슈말칼덴 전쟁 (문단 편집) === 후속전 === 그러나 전쟁 승리 이후 카를 5세는 1550년 <피의 칙령>을 내려 개신교도들을 더욱 가혹하게 탄압했고 신교도들의 불만은 나날이 높아졌다. 게다가 카를 5세의 독선적인 통치 방식으로 구교 제후들의 민심까지 이반되었다. 또한 카를 5세가 1531년 차기 황제인 [[독일왕]]으로 선출된 동생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 대공 겸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 국왕 [[페르디난트 1세]]를 내치고 자신의 장남인 [[펠리페 2세|펠리페 왕자]]를 차기 황제로 앉히려 하자 페르디난트 1세를 따르던 가톨릭 제후들의 민심까지 이반되기 시작했다. 특히나 장인인 헤센 방백 [[필리프 1세(헤센)|필리프]]에 대한 가혹한 처우에 분개한 작센 선제후 [[모리츠(작센)|모리츠]]는 개신교 제후들을 재결집한 후 비밀리에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와 샹보르 조약을 체결하여 동맹을 맺었다. 1552년 1월 마침내 반합스부르크 연합은 군사를 일으켜 남부 독일 일대를 장악했다. 5월 모리츠가 이끄는 신교도군은 [[오스트리아 대공국]] [[인스브루크]]에 머물던 황제를 공격했고, 카를 5세는 간신히 도망쳐 직접 [[알프스 산맥]]을 횡단하며 탈출했다. 카를 5세는 알프스 산맥 남쪽에 있는 오스트리아 최남단의 필라흐에 머물면서 설욕전을 치르기 위해 다시 군대를 모았으나, 구교파 최대 제후국인 바이에른 공국 뿐만 아니라 동생 페르디난트 1세까지 형의 명령을 거부하여 황제의 복수전은 무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